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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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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기원전 215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인 셀레우코스 4세가 죽은 후 왕위를 계승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집트 정복 직전까지 갔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단념했다.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통치를 가하며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교를 탄압하여 마카비 전쟁을 일으켰다. 파르티아 원정 중 급사했으며, 그의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혼란에 빠져 쇠퇴의 길을 걸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악인으로 기억되며,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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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티오코스 4세 흉상 (베를린 구 박물관 소장)
안티오코스 4세의 흉상 (베를린 구 박물관 소장)
이름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로마자 표기Antiokoseu 4se Epipaneseu
그리스어Αντίοχος Δ' Επιφανής
로마자 표기 (그리스어)Antiochos ho Epiphanes
별칭신이 나타난 자
재위 기간기원전 175년 9월 3일 – 기원전 164년 11/12월
시대안티오코스 시대의 위기
종교그리스 다신교
통치
국가셀레우코스 제국
직위바실레우스
이전 통치자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후임 통치자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
가문
왕가셀레우코스 왕조
아버지안티오코스 3세
어머니라오디케 3세
결혼 및 자녀
배우자라오디케 4세
자녀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
라오디케 6세
안티오키스
알렉산더 발라스 (추정)
라오디케 (미트리다테스 3세의 아내) (추정)
생애
출생기원전 215년경
사망기원전 164년 11/12월 (50–51세)

2. 생애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이자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의 동생으로, 원래 이름은 미트라다테스였으나 즉위 후 안티오코스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기원전 188년 로마 공화정과의 아파메이아 조약에 따라 로마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형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와 교환되어 시리아로 돌아왔다.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죽자, 아직 어린 조카 안티오코스 왕자의 섭정 자리에 올랐다가 몇 년 후 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주요 사건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와의 전쟁 승리가 있다. 이집트 정복 직전까지 갔으나, 로마의 개입과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철수해야 했다. 특히 그는 유대교를 탄압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등 가혹한 정책을 펼쳐 유대인들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하스몬 가문은 셀레우코스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직접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기원전 163년 도중에 급사했다.

또한, 동쪽에서는 세력을 확장하던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여 초기에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원정은 중단되었다. 그의 뒤를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가 이었으나, 왕의 죽음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어 약 100년 후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 시대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지막으로 강성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2. 1. 권력 장악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215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3][4] 그의 원래 이름은 미트라다테스였으나, 왕위에 오르면서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의 동생이기도 했다.

기원전 188년 로마 공화국과 맺어진 아파메이아 조약의 조건에 따라, 그는 로마에 정치적 인질로 보내졌다. 기원전 187년 그의 형 셀레우코스 4세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안티오코스는 형의 아들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조카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와 교환되어 풀려났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대신 로마의 인질이 되었다. 이후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에서 생활했으며, 기원전 175년 그의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재상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을 때에도 그곳에 있었다.

헬리오도로스가 스스로 섭정을 자처하며 잠시 권력을 장악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의 도움을 받은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기원전 175년 11월까지 시리아에 도착했다. 당시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데메트리오스 1세는 여전히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스스로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의 어린 아들인 또 다른 안티오코스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어린 조카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170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6]

2. 2. 통치 방식

안티오코스 4세는 사치스럽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안티오크 거리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뿌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선물을 주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과 델로스의 제단에 돈을 기부했다.[8] 또한 그는 안티오크 교외의 하르비예에서 모든 서부 군대의 대규모 퍼레이드를 열었고, 최고의 향신료, 의류, 음식으로 귀족들과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8] 그는 또한 용병으로 셀레우코스 군대를 보강했다. 이러한 지출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금고에 부담을 주었지만, 제국은 그것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그의 괴팍한 행동과 공중 목욕탕에 나타나거나 시 공무원 직에 지원하는 등 일반 백성과의 예상치 못한 상호 작용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칭호인 '에피파네스'(Ἐπιφανής|에피파네스grc, Epiphanes, 현현한 신)를 비꼬아 '에피마네스'(Ἐπιμανής|에피마네스grc, Epimanḗs, 광인)라고 부르게 만들었다.[7][8]

2. 3. 이집트 원정과 로마와의 관계

시돈에서 발행된 안티오코스 4세의 동전. 승리한 갤리선을 묘사하고 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즉위 후 로마 공화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에 힘썼다. 기원전 173년에는 아파메아 조약에 따른 배상금 잔액 일부를 로마에 보내며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로마와의 우호 및 동맹 조약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안티오코스가 로마의 동맹인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의 도움으로 즉위한 점이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70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의 섭정들은 코일-시리아 반환을 요구하며 셀레우코스 왕조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조카(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왕국이 혼란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이미 공격을 예상하고 군대를 배치해 대비하고 있었다. 이집트 군대가 펠루시움으로 진격하자 안티오코스 4세의 군대는 이를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이를 통해 셀레우코스 군대는 이집트 전역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 본토로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사로잡았다. 당시 로마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집중하고 있어 전통적인 동맹국인 이집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9]

안티오코스는 로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로잡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멤피스에서 괴뢰 군주로 내세워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가 철수한 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두 형제는 내전을 벌이는 대신 화해하고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10]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는 다시 이집트를 침공하고 함대를 보내 키프로스를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중, 로마의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에나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로마 원로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안티오코스에게 즉시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안티오코스 주변의 모래에 원을 그리고는 "이 원을 나가기 전에 원로원에 전할 답을 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는 즉각 철수를 약속하지 않으면 로마가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결국 안티오코스는 철수를 결정했고, 그제야 포필리우스는 그와 악수했다.[11]

고대 기록들은 이 사건, 소위 "엘레우시스의 날"을 안티오코스 4세에게 큰 굴욕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안티오코스가 로마의 개입을 내심 반겼을 수도 있다고 본다. 로마의 요구는 길고 비용이 많이 들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을 피할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큰 위험 없이 이집트를 약화시키고 상당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10][12]

2. 4. 유대교 탄압과 마카베오 전쟁

안티오코스 4세의 은화. 뒷면에는 제우스가 니케와 홀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어 비문에는 , "승리의 신현왕 안티오코스"라고 적혀 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처럼 유대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면서도, 유대 문화를 존중하고 유대교 기관을 보호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책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력과 이스라엘 대제사장 직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 혹은 진압된 후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반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미나.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지역적 반란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에서 일으킨 갈등과 그에 따른 반란은 이례적으로 기록이 잘 남아있다. 2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이 위기는 제6차 시리아 전쟁 발발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171년, 안티오코스 4세는 기존의 대제사장 야손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뇌물을 바쳐 그 자리를 얻은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 원정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유대에 퍼지자, 야손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기습했다. 이 소동으로 메넬라오스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야 했다.[13] 야손은 자신의 권력을 다시 확립하고, 왕의 부재 시 권력을 잡을 섭정에게 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정치적 혼란기에 추가적인 갈등 없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14]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는 살아 있었고, 로마에게 당한 외교적 패배와 자신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거부한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 속에서 이집트에서 돌아왔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메넬라오스를 복위시키고 수많은 유대인을 처형했다.[15]

:이러한 사건들이 왕에게 보고되자, 그는 유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맹수처럼 분노하며, 그는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만나는 사람들을 자비 없이 베고, 집에 숨어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젊은이와 노인,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학살이 벌어졌고, 처녀와 유아들이 살해되었다. 사흘 동안 8만 명이 죽었고, 4만 명이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며, 같은 수가 노예로 팔렸다.

::-- 2 마카베오기 5:11–14[16]

메넬라오스를 복위시킨 안티오코스 4세는 친그리스 성향의 유대인(헬레니스트)들을 지원하고 전통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령들을 공포했다. 그는 유대교의 종교 의식과 전통을 금지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제우스 숭배를 포함하는 혼합된 그리스-유대교 제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안티오코스가 "모세의 형상과 바깥 뜰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큰 돼지를 희생하고, 그 피를 뿌렸으며, 유대인들이 다른 모든 민족을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책에 돼지고기 국물을 적시도록 명령했다. 또한 성전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던 등불을 껐으며, 대제사장과 다른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했다.[17]

이러한 조치들은 지역 종교를 억압하지 않던 일반적인 셀레우코스 제국의 정책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지만,[18]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지역 공동체의 자치권과 지역법을 폐지하고 성소를 통제하려 했던 다른 헬레니즘 시대의 사례들과 유사한 측면도 있다.[14]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약탈당했으며, 안티오코스는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과 그리스 군대를 위한 요새인 아크라를 예루살렘에 건설했다. 이는 기원전 168년에서 167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19]

안티오코스 4세의 강압적인 정책은 결국 대규모 반란을 촉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카베오 혁명이다.[20] 이 때문에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 시기를 유대인들에게 '안티오코스 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21] 전통적으로 1 마카베오기와 2 마카베오기에 묘사된 것처럼, 마카베오 혁명은 외세의 정치적, 문화적 억압에 맞선 민족적 저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 내 전통주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헬레니즘 유대인 사이의 내전에 개입한 측면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22][23] 이에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하스몬 가문의 지도 아래 봉기하여 안티오코스가 파견한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는 등 저항을 이어갔다. 안티오코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대 침공에 나섰으나, 도중인 기원전 163년에 급사했다.

학자들은 이 시기의 반란이 다니엘서 저술의 배경이 되었다고 보며,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북방 왕"이라는 악당은 일반적으로 안티오코스 4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니엘서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결국 파멸하는 안티오코스의 모습은 이후 기독교적그리스도 묘사에도 영향을 미쳤다.[25]

2. 5. 파르티아 원정과 죽음

노엘 알레의 그림, 기원전 164년경 안티오코스가 전차에서 떨어지는 모습


파르티아의 왕 미트리다테스 1세는 안티오코스 4세가 서쪽에서 겪고 있던 문제들, 특히 유대 지역에서의 반란을 기회로 삼아 동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기원전 167년, 파르티아 군대는 헤라트를 점령하고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여 헬레니즘 세계를 사실상 동서로 분단시켰다.

안티오코스 4세는 동쪽 국경의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유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마카베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리시아스 장군에게 군대를 맡겨 파견하는 한편, 자신은 직접 셀레우코스 제국 군대를 이끌고 파르티아에 맞서 동방 원정에 나섰다.

원정 초반, 안티오코스 4세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재정복하고 아르탁시아스 1세를 사로잡았다.[26][27] 그의 군대는 엑바타나를 거쳐 옛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도시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격퇴당했다.[28] 이후 귀국하던 중, 기원전 164년 이스파한 근처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9]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종교적인 해석이 존재한다. 그가 죽기 직전 페르시아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여신 나나야의 신전을 약탈하려 시도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의 죽음을 신성 모독에 대한 나나야 여신의 징벌로 보기도 한다.[30] 유대교 문헌에서는 그의 죽음을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행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2 마카베오기는 그가 끔찍한 질병으로 고통받다 죽었다고 상세히 묘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시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치유될 수 없는 타격을 내리셨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격심한 복통과 함께 속이 뒤틀리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다른 사람들의 창자를 온갖 고통으로 괴롭혔던 그였으니,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오만함을 꺾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교만해져서, 유다인들을 향한 분노의 불을 내뿜으며 더 빨리 말을 몰라고 명령했다. 그러다가 그는 쏜살같이 달리는 병거에서 떨어졌는데, 그 심한 충격으로 온몸의 뼈마디가 뒤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인적인 교만함으로 바다의 파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높은 산들의 무게를 저울로 달 수 있다고 여겼던 그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들것에 실려 가게 되었으니,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권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 악한 자의 몸에서는 구더기가 들끓었고,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이 썩어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온 군대가 역겨워했다.[31]

— 2 마카베오기 9장 5-9절 (공동번역 성서)


후대의 랍비 문헌인 안티오코스 두루마리 (메길라트 안티오쿠스)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티오코스가 자신의 군대가 유대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안 도시로 도망쳤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그를 "도망자"라고 조롱하자 결국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다.[32] 하지만 이 이야기는 폴리비오스나 2 마카베오기보다 훨씬 후대인 2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역사적 정확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안티오코스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뒤를 이은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의 즉위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파르티아 원정은 중단되었고,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과 각지의 반란이 격화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4세 시대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지막으로 강성했던 시기로 평가받으며, 그의 죽음은 제국 몰락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약 100년 뒤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3. 평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남긴 기록과 행적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유대교 전통에서는 하누카와 관련된 사건들로 인해 그를 주요 박해자이자 악인으로 간주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는 마카베오기와 같은 문헌에 잘 드러나 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 역시 대체로 그에게 비판적이지만, 일부 기록은 저자의 개인적인 관계나 정치적 배경에 따른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기록은 안티오코스 4세의 경쟁자였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와의 친분 관계 등으로 인해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안티오코스 4세를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정치적 능력이나 헬레니즘 문화 확산 노력 등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며, 그의 통치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안티오코스 4세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로, 그의 통치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유대 역사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3. 1. 유대교 전통에서의 평가

게오르크 펜츠의 안티오코스 묘사


안티오코스 4세는 하누카와 관련된 유대교 전통, 특히 마카베오기와 "안티오코스 두루마리"에서 주요 악당이자 박해자로 기억된다.[33] 랍비 문헌에서는 그를 הרשע|하라샤he("악인")라고 부른다. ''유대 백과사전''은 유대교와 이교도 자료 모두 그를 잔인하고 허영심 많은 통치자로 묘사하는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정확한 평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그가 헬레니즘 문화를 자신의 왕국 모든 백성에게 강요하려 했지만, 정작 그 문화의 본질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34]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제2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의 이름을 "유피테르 헬레니우스 신전"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요세푸스는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관습을 따르거나 유대교 경전을 소지한 사람, 할례를 받은 남성을 처형했다고 묘사한다.[35]

이러한 박해와 성전 모독 행위는 유대 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통치는 유대인들에게 '안티오코스 위기'로 불리기도 한다.[21] 학자들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북방 왕"이라는 악당이 일반적으로 안티오코스 4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다니엘서에서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결국 파멸하는 모습은 이후 기독교적그리스도 묘사에 영향을 미쳤다.[25]

3. 2. 역사적 평가

안티오코스 4세는 동전에 Θεὸς Ἐπιφανής|테오스 에피파네스grc("현현한 신")나 이집트 정복 이후 사용한 Νικηφόρος|니케포로스grc("승리의 전령") 같은 신격화된 칭호를 새긴 최초의 셀레우코스 왕이었다.[36] 이는 당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헬레니즘 군주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거나,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가 제국 내에 확립한 통치자 숭배를 발전시킨 것일 수 있다.[36]

고대 기록, 특히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저술과 마카베오기에 나타난 유대인의 관점은 안티오코스 4세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후대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37][39] 폴리비우스는 안티오코스 4세가 선술집 등에서 평민들과 어울리며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현대적 시각과는 달리 고대 엘리트주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행동이었다.[37]

그러나 이러한 고대 기록들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모든 기록이 안티오코스 4세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며,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그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지 않았다.[37] 또한 폴리비우스는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이자 경쟁자였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와 로마 망명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폴리비우스의 출신지인 아카이아 동맹 역시 셀레우코스 제국과 전통적으로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그의 기록이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37]

현대 일부 역사가들은 안티오코스 4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도브 게라는 폴리비우스의 기록이 정치적 편향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안티오코스 4세를 "재능 있고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했다.[37] 역사가 닉 세쿤다는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수십 년 뒤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자신이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점을 들어,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안티오코스 4세가 긍정적으로 기억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38][39] 심지어 안티오코스 4세에게 매우 비판적인 1 마카베오서조차 그가 임종 직전 "권세 있는 날에 사랑받았다"고 회고하며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38][39]

결론적으로 안티오코스 4세는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하고[36] 이집트 원정을 통해 제국의 영토 확장을 시도하는 등[37] 적극적인 군주였지만, 유대교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과 예루살렘 성전 모독은 마카비 전쟁이라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39]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혼란에 빠지며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4. 유산

안티오코스 4세는 동전에 신성한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셀레우코스 왕이었다. 이는 이전에 칭호를 사용했던 박트리아의 헬레니즘 왕들이나,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 내에서 성문화한 통치자 숭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사용한 칭호에는 Θεὸς Ἐπιφανής|테오스 에피파네스grc("현현한 신")와 이집트 정복 시도 이후 사용한 Νικηφόρος|니케포로스grc("승리의 전령") 등이 있다.[36]

그의 통치는 특히 유대교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헬레니즘화 정책을 강요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는 등 탄압을 자행했다. 이는 마카비 전쟁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하스몬 가문은 유대인 저항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비록 안티오코스 4세가 직접 유대 반란 진압에 나섰다가 급사했지만, 그의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은 후대 유대인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티오코스 4세 시대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지막으로 세력을 떨친 시기였으나, 그의 죽음은 제국 쇠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 대한 군사적 성공이나 파르티아 원정 초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의 즉위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극심한 혼란과 내분을 야기했다. 결국 이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급격한 쇠퇴로 이어졌고, 약 100년 후 로마에 의해 멸망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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